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LA 폭동 (문단 편집) == 전개 == 폭동의 발단은 '로드니 킹 사건(Beating of Rodney King)'에서 시작된다. [[1991년]] [[3월 3일]] 이른 저녁, 미국 [[로스앤젤레스]] 210번 고속도로에서 로스앤젤레스 경찰국과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 등 경찰관들이 서쪽 방향으로 과속을 하던 차량 1대([[현대 엑셀]] 5도어 해치백)를 추격전 끝에 멈춰 세운 뒤, 운전자를 현장에서 붙잡았다. 운전자인 [[흑인]] 남성인 [[https://en.wikipedia.org/wiki/Rodney_King|로드니 킹]](1965~2012. 사건 당시 27세)은 음주 상태로 과속 주행을 하고 있었고, 번쩍이는 경광등과 사이렌의 소리를 감지하고도 차량을 세우지 못했다. 킹은 술에 취한 탓인지 차에서 내리라는 경찰의 명령에 더디게 응했고, 경찰의 명령대로 땅에 엎드려 있지 못했다. 오히려 킹은 다른 경관들에게 저항했으며, 경찰의 체포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전히 조사되지 않은 중범죄 용의자인 킹은 경찰관을 향해 달려갔다. 킹은 도망칠 계획이었다. 이때부터 경관들이 [[톤파]]를 사용해 킹을 구타하기 시작한다. 분명히 킹은 체포에 저항했으며, 경찰의 명령을 지속적으로 따르지 않고, 몸수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원은 경찰관들이 초기에 로드니 킹을 위험하다고 인식한 것은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킹은 당시 강도, 폭행,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가석방 된 상태였는데, 만약 자신이 과속으로 잡힐 경우, 가석방 조건에 걸려 도로 수감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거칠게 행동했다고 밝혔다.[[http://www.nbcnews.com/nightly-news/george-holliday-who-taped-rodney-king-beating-urges-others-share-n372551|영상]] 또한 [[마리화나]]도 흡입한 상태였다 [[https://www.latimes.com/archives/la-xpm-1991-03-22-mn-559-story.html|신문]] 폭동 1년 후에 있었던 재판에서는 대부분의 구타는 적법하였고, 로드니 킹의 저항을 제압하려는 시도에 있었으며, 이는 경찰 정책에서 허용하는 수준의 무력 사용이었다고 판단했다. 위법성이 인정된 것은 마지막 6번의 폭행만 인정했다. 실제로 로드니 킹은 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누워서 저항을 했다 피투성이가 된 킹은 그대로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는데, 이 장면을 인근 주민이 비디오로 찍어 방송사에 제보를 하게 된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 경찰서장 데릴 게이츠 [[총경]](Daryl Gates, 1926~2010)은 아무런 대응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문제가 생길 경우에는 훌륭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언플만 하고 있었다. 결국 3월 15일에 킹을 구타한 경찰관 4명은 기소되었고, 7월 9일에는 경찰 위원회가 과잉폭력 인정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정말 문제가 잘 해결될 듯 싶었으나,[* 로드니 킹 사건에서 주범인 4명의 경찰들에 대한 재판이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LA 폭동은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가 넘어가 [[1992년]] 2월 5일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법원이 배심원에서 '''흑인을 한명도 배치하지 않고 백인 배심원들만 참여하게 하면서''' 몇 개월 동안 진행된 법정 심의 결과 4월 29일에 발표된 판결은 '''경찰관 4명 중 3명은 무죄, 1명은 재심 결정.''' 당시 현장에 있었던 5명의 이름은 스테이시 쿤, 로런스 파월, 티머시 윈드, 시어도어 브리세뇨, 롤란도 솔라노[* 5명 중 이 사람만 킹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아직 현역이다.]이다. 당시 배심원은 10명의 백인, 1명의 히스패닉계 미국인, 1명의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구성되었고 검사 테리 화이트는 흑인이었다. 취재 열기가 뜨거운 탓에 재판지를 옮겼는데 '''그 동네 사람들 대신 근처 다른 동네 구역, 그것도 백인 및 히스패닉 구역에서 배심원을 모집했다.'''[* 검사가 흑인이긴 하지만, 배심원에 히스패닉계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은 배정해 놓고 그보다 수가 많았던 미국 흑인을 한 명도 배정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인종차별이다.] 무죄 평결 소식은 TV와 라디오로 즉각 발표됐다. 당시 흑인계 톰 브래들리 LA시장은 '''믿을 수 없는 판결'''이라고 했다. 이런 판결에 분노한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판결이 발표된 그 날 길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시위는 점점 폭동으로 변해갔고, 곳곳에 방화 및 약탈, 총격전이 벌어지며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지나가는 차량을 세우고 운전자를 끌어내려 구타하는 등의 장면이 생중계로 보도되었다. [[https://youtu.be/NM8Y6uPH-R4|#]][* LA 폭동을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인 트럭기사 레지날드 데니의 폭행 장면이다. 흑인 4명이 차를 세우고 기사를 끌어내려 소화기와 벽돌 등으로 마구 구타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뜨리는 것이 방송국 헬기로 생중계되었다. 방송을 본 몇몇 사람들이 도우러 온 덕분에 레지날드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심각한 장애를 겪게 되었다.] 그리고 방화와 약탈이 TV로 방송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게이츠 총경은 정치자금 모집을 위한 집회에 참여하느라 자리를 비워서 초동 진압 시점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SWAT]]의 창설자로서 탄탄대로가 보장되어 있었던 게이츠 총경은 이 사건으로 직위해제, 1992년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한다. 이후에도 게이츠 총경은 경찰 관련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폭동은 점점 규모가 커졌고, 흑인은 물론 [[히스패닉]] 갱단들까지 무장하고 합세하여 경찰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육군]] 병력 6,000명과 다수의 [[험비]], [[트럭]], [[미합중국 육군|연방 육군]] 제7[[보병]][[사단(군대)|사단]] 2,000명 및 제40보병사단 [[미합중국 육군/군사경찰|헌병]][[중대(군대)|중대]], [[제1해병사단(미국)|제1해병사단]] 병력 1,500명, 제1경기갑[[정찰]][[대대]]와 [[LAV-25]] [[장갑차]] 투입 명령을 내렸으며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아예 [[제82공수사단]] [[공수부대]] [[대대]]를 18시간 안에 배치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뒀다. 연방군이 '''폭동 진압에 동원된 건 1968년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로 처음 일어난 일이다.'''[* 이 로드니 킹 사건과 두순자 사건의 여파가 마틴 루터 킹의 암살에 비하는 분노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서술된 것처럼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에도 미국 흑인들의 폭동이 일어나긴 했는데, 마틴 루터 킹은 미국 흑인들 모두에게 있어서는 영웅 중의 영웅으로, 마틴 루터 킹의 암살은 큰 충격과 분노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총합 13,500명에 달하는 [[사단(군대)|사단]]급 군대가 투입되면서 경찰과 함께 폭동을 진압하기 시작해 5월 4일에 폭동이 모두 종결되었다. 이 폭동으로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58명, 부상자 2,383명, 체포된 사람은 13,779명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